[800일 기념] 시간

2022. 3. 13. 00:09함께 하는 시간/w. G'raha Tia

돌의 집, 미명의 방.

넓은 공간에 수 개의 침대가 놓여있는 이 곳은 마치 병동을 연상케 한다. 그 말이 아주 틀리지는 않은 것이기에 이베르는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 멤버들의 혼이 1세계로 건너갔을 때도 그러지 않았던가. 그들의 육신은 여기 누워 쿠루루와 타타루의 정성어린 간호를 받아야만 했다. 다행히도 그들 모두는 무사히 깨어났으나, 이제는 그라하가 여기에 홀로 누워있다. 이베르는 아직까지도 깨어날 기미가 없는 그의 곁에서 한 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꼭 필요한 일에만 몸을 움직였고 그 외의 시간은 모두 이 적막한 방에 쏟아부었다. 그러면서도 잠과 식사 등은 제대로 챙기는 덕분에, 새벽 멤버들도 딱히 그녀에게 걱정을 빙자한 잔소리를 늘어놓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랬던 그녀가 아주 오랜만에,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몸을 일으킨 것이다.

 

낡은 나무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조금은 초췌해진 영웅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야슈톨라와 타타루의 만류로 미명의 방에 자주 출입하지 못하는 새벽 멤버들은 간만에 보는 그녀에게 애정어린 인사를 건넸으나, 이베르는 그저 작은 미소로 답을 대신하고는 휑하니 자리를 떠나버렸다. 무엇 때문인지, 행선지가 어디인지도 알려주지 않았다. 아무리 링크펄을 보내봐도 대답이 없으니 새벽 멤버들은 그저 노심초사하며 이베르가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불안해서 안 되겠다고, 당장 그녀를 찾으러 가야겠다는 알리제를 진정시키면서.

그렇게 며칠 뒤. 다시금 돌아온 이베르의 표정은 전에 없이 활짝 펴져 있었다. 물 먹은 솜처럼 축 처져있던 어깨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고 양 손에는 온갖 종이봉투가 가득 들려 있었다. 의외의 모습에 새벽 멤버들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녀를 바라보았고, 곧 돌의 집 로비에 그녀의 밝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곧 라하와 내 기념일이거든. 그 때 라하가 깨어날 수도 있는데 아무것도 없으면 좀 그렇잖아."

"그럼... 여태까지 쇼핑을 하느라 우리 링크펄도 받지 않았다는 거야?"

"아, 미안. 그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좋은 물건을 만드려면 꽤 집중해야 했거든, 그래서 그랬어."

"...만든다고? 산 게 아니라? 그럼 쇼핑이 아니었어?"

 

명백하게 토라진 알리제의 타박과 질문공세가 시작되려는 순간이다. 이베르는 곤란한 웃음으로 상황을 간단히 무마해버린 후 잽싸게 미명의 방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그리고는 좁은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붉은색 팻말을 문에 척 걸어두고는 다시 모습을 감췄다. 끼익, 나무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그 모습도 퍽 얄미웠건만 팻말에 적힌 문구는 한층 더했기에, 몇몇 새벽 멤버들의 복장 터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이베르 외 출입금지! 오늘이 지날 때까지.』

 

"이런 연애는... 아무래도 이베르 공의 집에서 하는 것이 도리겠지만... 사, 상황이 특수하니 이해 못 해 줄 것도 없다고 생각하네."

 

이 사태를 수습해야겠다 판단한 알피노는 또 열심히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잔뜩 골이 난 알리제와 고개만 젓는 산크레드, 말없이 바닥만 응시하고 있는 에스티니앙, 그리고 이 일련의 해프닝이 재미있다는 듯 기묘한 웃음을 달고 있는 야슈톨라와 타타루까지. 그들의 시간은 그렇게 지나고 있었다. 

*

침대 주변은 색색의 풍선으로 장식하고 머리맡에는 커다란 붉은 리본을 매달았다. 1세계에서 야영할 때 쓰던 작은 고깔모자들은 주변의 탁자에 나란히 늘어놓는다. 쉴 새 없이 바스락대는 종이봉투 안의 바구니를 꺼내들면, 기다렸다는 듯 아이들이 폴짝 튀어나와 그라하의 양 옆자리를 차지하고 삐약삐약 울어댄다. 얼른 일어나라는 듯이.

 

"아쉽게도 무설탕은 못 데려왔어. 설탕에 대한 미련을 아직 다 버리지 못했거든. 여기 데려왔다가 돌의 집 설탕을 다 없애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라하, 네 에테르가 어디로 빠져나가고 있는지 모르겠어. 야슈톨라도 모르겠대. 하지만 만약 이 현상이 시공간의 뒤틀림 때문이라면, 지금 내가 들려주는 음악은 어딘가의 너에게 가 닿을 수 있겠지. 그러니 조금만 더 힘을 내. 곧 눈을 뜰 수 있을 거야. 아이들과 내가 기다리고 있는 여기 이 곳, 현재의 시간에."

 

이베르의 손에는 네모낳고 작은 기기 하나가 들려있었다. 원초세계에서도 1세계에서도 볼 수 없던 독특한 형태였다. 아마도 그녀가 시드, 네로와 함께 머리를 맞대어 고안해 낸 것이리라. 기기에 붙어있는 길고 가느다란 레버를 조심스레 들어올리고 알라그 석판 기기를 몇 번 조작하면, 치직- 하는 기계음과 함께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원초세계로 돌아온 뒤 그라하가 그녀를 위해 연주해주었던 곡이다. 석판 기기의 한계에서 벗어나 한층 더 부드럽고 선명해진 연주곡의 울림은 미명의 방 곳곳을 천천히 채워가고 있었다. 차갑고 우울하게만 느껴지던 곳이 따뜻한 색채로 물들어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우리의 800일을 함께 축하하자, 그라하 티아. 늘, 언제나 사랑해. 얼른 일어나서 예쁘게 핀 동백꽃도 함께 보러 가자."

 

그녀의 말에 아이들도 앞다투어 삐약 소리로 대답했다. 화려하지 않고 잔잔하게 흐르는 특별한 날, 그라하와 이베르의 시간은 그렇게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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