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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3. 1. 18:21흔적/고장난 기록 시스템

1세계에 밤이 되돌아오고, 크리스타리움과 율모어가 한참 교류의 장을 트던 때. 모종의 사유로 수정공의 의식의 조각이 원초세계로 넘어와 영웅의 발자취를 쫓게 되었다. 이것은 영웅이 겪은 모든 일들을 하나하나 직접 겪어가던 그의 조각이 남긴 기록이다.

 

눈을 뜨니 마차 안이었다. 내 앞에는 조금 더 어려 보이는 알리제와 알피노가 앉아있었고, 이런저런 일련의 일들로 곧 나는 상황을 완전히 파악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내 의식의 일부가 이 곳, 원초세계로 건너온 것이다. 그리다니아에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 곳의 시간대는 본디 내가 있던 '현재'가 아님을 알아챘다. 이것은 어쩌면... 영웅이 지나온 과거. 그가 초보 모험가에서부터 영웅으로 불리우고 용시전쟁 종결자가, 해방자가, 더 나아가 1세계에 밤을 불러오는 어둠의 전사가 되기까지의 시간. 진실로 그렇다면 원초세계에서의 내 이 여정 또한 아주 길어지겠지. 하지만 괜찮다. 1세계는 안정되었으며 크리스타리움의 주민들은 강하고도 현명하다. 율모어의 사람들도 다시 일어서려는 의지가 가득하니 당분간은 내가 없어도 괜찮을 것이다. 그저 기록으로만 접하던 영웅의 흔적을 이렇게 직접 마주하며 겪을 수 있는 것도, 어쩌면 내게 허락된 또 하나의 기적일 것이니. 지금은 그저 뜻하지 않은 이 여행에 집중하자. 마지막엔 분명 돌아갈 길이 생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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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타리움이 자리를 잡은 뒤로는 내 발로 걸어 멀리 나가 본 적이 드물었다. 레이크랜드를 둘러볼 때도 되도록이면 아마로를 타고 이동했었으니까. 지금 이렇게 가벼운 몸으로 직접 걷고 뛰는 감각은, 너무 오래 되어 생소하게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내겐 크나큰 기쁨이다. 그나저나... 영웅은 자신만의 초코보가 있으니 나도 금방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초보 모험가에게는 전용 초코보를 쉽게 내어주지 않는 거였군.
참. 그리다니아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니다 어떤 이의 작은 부탁을 해결해주던 중,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초코보 뼈다귀'라는 말을 들었다. 이것은... 정말로 참신한 비유이지 않은가! 크리스타리움이 율모어와 교류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언어생활도 점점 거칠어져 고민이었는데, 이 말이라면 너무 과하지 않은 선에서 상대의 부적절한 언행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1세계에 초코보는 없으니 아마도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아마로...'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안 될 것 같다. 아마로도 병아리도 수정단검어도, 모두 1세계의 귀하고 귀한 생명들이다. 그런 생명들을 대상으로 부정적인 언어유희를 일으킬 수야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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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장막 숲 북부, 소근소근 덤불 근처의 에 타타 감시초소에서 포르몽이라는 자를 만났다. 아마도 여기 귀곡부대원들의 식사를 책임지는 것 같은데... 주변 지역 경비와 정리 등의 업무가 있지만 따끈한 스튜가 들어있는 냄비 불을 조절하는 것도 자신의 중요한 임무라 말하는 그의 모습이, 작은 일에도 늘 최선을 다하는 크리스타리움의 주민들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영웅도. 그도 항상 이러한 자세로 앞을 향해 나아갔겠지. 나도 좀 더 힘내서 매사에 정성을 다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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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투이 콩을 전해주러 간 숲언덕 공방에서 에메리아라는 사람을 만났다. 아름답지만 자그마한 이 마을을 둘도 없는 고향이라 칭하고, 풍족한 삶은 아니더라도 본인을 반겨주는 장소가 있으니 충분히 행복하다는 그녀의 말에 나도 동감을 표했다. 내가 뿌리를 내린 곳, 나를 반겨주고 내가 돌아갈 수 있는 곳. 그래- 이제는 나도 그런 소중한 장소와 사람을 다시금 꿈꾸고, 원할 수 있다. 내게도 미래가 생겼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