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머리 친구를 기억하며

2023. 7. 19. 15:32함께 하는 시간/과거의 기록 시스템

지긋지긋한 신과의 전쟁을 겨우 끝마친 뒤였다. 이면의 진실은 이름 없는 밀레시안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했다. 이대로 에린에 남아있어도 정말 괜찮은가? 그러나 어떤 결론을 내려도 스스로 이 곳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었으니 질문 또한 무의미했다. 그렇기에 찾은 답이, 당분간 던바튼에서 조용히 아르바이트나 하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겸사겸사 개인 농장의 작물도 성실히 기를 생각이었다. 물론 그 계획은 처참히 무너졌지만.

 

"글리니스, 농장 씨앗은 이제 안 주나요?"

"아이구. 씨앗이 필요했나 본데 이제 그건 취급하지 않는다우. 대신이라기엔 뭣하지만 자, 여기 송이버섯 스프 한 그릇 들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봐요."

 

아, 젠장. 변화는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도통 판단이 안 선다니까. 그 금발머리 녀석은 이것조차 아튼 시미니의 안배라고 할 테지. 이름 없는 밀레시안은 속으로 끝없는 불만을 토로하며 글리니스가 주는 수프를 받아들었다. 한 그릇 비우고 달걀과 감자를 넉넉히 채집한 후 농장에 틀어박혀 잠이나 잘 요량이었다. 일어나면 고급 나무장작을 모으며 씨앗 수급 방법을 야옹해 봐야... 야옹?

 

"야옹."

 

언제부터였을까. 덩치 큰 고양이 한 마리가 이름 없는 밀레시안의 발등 위에 올라앉아 눈을 부비고 있었다. 에린에 이렇게 큰 고양이가 있었던가? 하긴, 자이언트만한 코기도 돌아다니는데 점보 고양이가 뭐 대수라고. 훠이 훠이. 밀레시안은 손을 휘저으며 고양이를 보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정말이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마치 여기가 제 자리라는 듯이.

 

"이봐... 날 따르는 동물인지 요정인지 용인지가 벌써 50종이 넘어. 너까지 데리고 다닐 수는 없다고. 그러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 봐."

 

이름 없는 밀레시안은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려 최선을 다했으나 고집 센 고양이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어서 깊은 한숨만을 자아냈다. 어떻게 할까, 가만히 고양이를 내려다보며 고민하던 밀레시안은 문득 오래된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 * *

 

 

어린 시절, 몇 번이나 알 수 없는 곳에 떨어지곤 했었다. 아주 잠시잠깐 머물렀다가 다시 원래 장소로 되돌아오곤 했는데 그건 꽤 재미있었고 본인에게도 위로가 되는 일이었다. 자신에게만 내려진 그 작은 기적은 전쟁으로 얼룩진 세계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였으니까.

어느 날, 누군가의 집에 툭 떨어졌었다.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키 큰 하얀 머리 하나, 그리고 조금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고양이 귀와 꼬리가 달린 작은 키의 붉은 머리 하나. 작은 붉은머리가 자기보다 큰 하얀머리를 안아들고 있는 폼이 퍽 웃겨서 그들에게 총총 다가갔었다.

 

'여긴 어디야? 넌 누구야? 네가 여기 주인이야?'

'여긴... 우리 집이고, 나는 xxx라고 하는데. ...네 이름도 알려줄 수 있을까?

 

붉은머리의 이름만큼은 잘 들리지 않았었다. 마치 그 부분만 안개에 가려진 듯 희미해서 그것이 못내 아쉬웠더랬지.

 

'난 이름 같은 거 없는데, 역시 여기도 다들 이름이 있나 보네. 그 키 큰 사람도 이름이 있어?'

 

에린에서야 이름을 알리고 싶지 않아 스스로 '이름 없는 밀레시안'이 되었다지만 당시엔 정말로 이름이 없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아무도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고 스스로도 이름이 필요하다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모두가 이름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도 가지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긴 했었다. 붉은 머리가 알려 준 하얀 머리의 이름은 '이베르'였다. 겨울이라는 뜻이었기에 이름으로서는 부적절한 단어였으나 한편으로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무슨 일이 있었더라.

 

'...너같은 귀와 꼬리를 가진 사람은 처음 봐서 신기해, 그래서 만져보고 싶은건데. 안 되는 거야?'

'으음... 이베르에게는 비밀이야. 세게 만져도 안 되고.'

'...고양이 꼬리 같은데. 혹시 막 보름달이 뜨는 밤엔 고양이로 변하는 종족이야?'

'그럴 리가, 귀여운 상상이네. 나도 평범한 사람인걸. 아니면 네가 있던 곳에는 그런 종족이 있는 건가?'

'내가 사는 곳엔 보름달이 뜨면 늑대로 변하는 종족이 있어. 상당히 희귀한 종족인데, 그들 중에서도 너처럼 선명한 붉은 눈을 지닌 개체는 못 봤어. 그래서 말인데... 혹시 마법같은 거 쓸 수 있어? 우린 그런 거 못 하거든.'

'눈이 붉은 건 평범한 게 아니긴 하지만. 마법이라면... 이런 것?'

 

그랬었다. 붉은 머리의 꼬리를 만져보기도 했고 그에게서 독특한 선물도 받았었다. 마법으로 만들어 낸 녹지 않는 얼음덩이. 선물을 받은 일곱 살 아이는 '붉은 머리는 하얀 머리와 같이 있으니 외롭지 않겠다'고 말했었고, 그도 그 말에 동의했었지.

 

'...네가 만들어 준 이 얼음은 녹지 않는 건가 봐. 내가 가져가도 돼? 그러면 돌아가서도 외롭지 않을 것 같아. 너처럼!'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언제든 외롭지 않기를 바라. 나처럼.'

'응, 그럴 거야! 그리고, 그리고... 네 옆에 있는 그 키 큰 사람의 이름도 내가 빌려갈게. 난 아직 이름이 없으니까 그걸 내 이름으로 할래! 그럼 오늘 일도 잊지 않을 수 있을 거야.'

'그래... 이베르. 자, 이렇게 하면 더 잊을 수 없겠지.'

 

붉은 머리는 그렇게 말하며 자기 머리에 꽂혀 있던 실핀 하나를 빼 아이에게 꽂아주었었다. 이름 없는 밀레시안은 지금까지도 그 얇고 까만 실핀을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수백 수천 번의 생과 사를 겪으면서도 결코 그것만은 놓지 않았었다.

 

'선물 고마워. 언젠가 내가 여행을 떠나게 되면 꼭 여길 찾아올게. 그럼 널 다시 볼 수 있겠지?'

'그래, 기다리고 있을게.'

'응, 내가 또 찾아왔을 때 모른 체 하면 안 돼! 잘 있어, 이름이 안 들리는 붉은 고양이족 친구야!'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붉은 고양이족 친구'가 있는 곳에 떨어지지 못했다. 그 때가 마지막일 줄 알았더라면 좀 더 이야기를 나눴을 텐데. 이름 없는 밀레시안은 또 한 번 후회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여전히 제 발등을 접수한 붉은 고양이의 등을 느리게 쓰다듬어주다가 통통한 꼬리에도 슬슬 손을 가져다 대어본다. 어린 시절 만졌던 '붉은 고양이족 친구'의 꼬리와 너무도 똑같은 감촉이었다. 그 친구의 꼬리도 이렇게 따뜻했고 폭실했었지. 애초에 잘 들리지 않았기에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그럴 수 없는 그의 이름, 대체 뭐였더라.

 

"라...그, 하. 하그라? 라...하그....? 라하?"

"야옹."

 

밀레시안의 입에서 '라하'라는 발음이 나오자 붉은 고양이는 기다렸다는 듯 야옹, 야옹 하고 울기 시작했다. 마치 그것이 제 이름이라는 듯. 아, 어쩔 수 없다. 이건 불가항력이야. 곤란한 미소를 짓던 밀레시안은 결국 가방에서 이름표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래, 붉은 고양이족 친구를 닮은 붉은 고양아. 네 이름은 이제부터 라하야. 앞으로 잘 부탁해. 그리고 내 이름은... 이베르야. 이건 비밀이니 너만 알고 있어야 해."

 

 

 

Fin.